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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자와 연주자의 관계는 흡사 변덕 많은 연인 사이 같다. 연주자에 대한 선호가 강할수록 변덕은 더 심하다. 오랜만에 알프레드 브렌델(Alfred Brendel.1931~)의 슈베르트 연주를 찾아들으며 느낀 생각이다. 비록 오래 전이지만 한때는 브렌델의 음반-주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한 장을 사기 위해 먼 거리를 왕래했으며 귀밑머리를 길게 기른 유태풍의 헤어스타일,두터운 검은 뿔테 안경이 특징인 브렌델 얼굴이 크게 부각된 필립스의 그 음반 한 장을 보물처럼 품에 안고 돌아올 때 기분은 나를 듯 했다. 그 이름은 슬며시 잊혀졌다.CD 시대 개막이 전기가 되었을 것이다. 간결하고 냉정할 정도로 정확한 그 연주는 언제나 긴 여운을 남기며 단단한 신뢰감을 안겨줬다. 적절하게 감정을 억제해서 도리어 듣는 사람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는 능란한 기법이 그의 상표였다.

 

브렌델을 찾은 것은 이블린 크로세(Evelyne Crochet,1934~)가 연주한 슈베르트의 <즉흥곡>과 같은 계열의 세 개의 소품(D.946)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태생에 미국에서 주로 활동한 크로세는 지금 내가 한창 열애중인 피아노 연주가. 그의 바흐 <평균율>연주는 비할 데 없는 평정심과 맑은 품격을 보여준다.

 

이블린 크로세의 슈베르트 소품 연주 역시 최상급이었다. 슈베르트 말년의 보석인 이 3곡, 특히 2번 연주를 들는 순간 '갑자기 우아하고 화사한 회상의 정원'에 들어와 있는 느낌에 젖었다. 회상은 슬픔의 회상이다. 그런데 슬픔을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는가. 어둡고 우울한 슬픔의 회상이 아니라 아름답고 멋진 슬픔의 회상! 이것이 슈베르트 음악이다.'슬픔에 의해 만들어진 음악만이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작곡자가 일기에 남겼다는 글귀이다.

 

아름다운 선율의 창조자로 으뜸인 슈베르트에게 교향곡을 비롯 많은 작품이 있지만 실제로 내가 가장 즐겨 듣고 친근감을 느끼는 곡은 <즉흥곡>과 <피아노소품> 등이다. <즉흥곡.D899>의 3번과 <즉흥곡.D935>의3번에 나는 한 시절 완전히 들려 지냈다. 불과 십분여의 이 선율이 내게 교향곡이나 소나타 못지 않은 비중을 가졌다.

 

안드레이 가브릴로프(Andrei Gavrilov(1955), 러시아 전후세대인 이 연주가 역시 내가 지금 열애중인 연주가이다. 그의 바흐 <프랑스조곡> 연주는 백만불 급 연주.

 

그는 가끔 양손 중지에 큰 호박반지를 끼고 연주하는데 이 호박이 마력을 발휘하는지 듬직한 체구에 믿어지지 않을만큼 섬세한 감각을 뽐낸다. '건반의 세공사'란 칭호를 그에게 붙여놓았다. 그의 슈베르트 <즉흥곡>연주 역시 섬세하고 강약의 대비가 뚜렷한 이색 연주로 듣는 맛이 새롭다. 여기 소개한 바 있는 마리아 유디나의 슈베르트 연주도 개성 강한 독자 취향과 해석으로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간결한 음 처리와 탁월한 리듬감, 애매한 것을 허용하지 않는 선명한 태도, 이것이 <즉흥곡>의 맨 얼굴을 드러낸다. 고독과 비애의 솔직한 고백, 이것이 그가 해석한 <즉흥곡>일 것이다. 특히 마리아 유디나의  <즉흥곡.D935> 연주는 그의 좋은 특성들이 고루 발휘된 멋진 연주이다.

 

알프레드 브렌델은 어떨까? 그는 이미 낡았을까? 자연스럽게 눈길이 그에게 향했다. 브렌델은 1976~1977년 사이 독일 라디오 브레멘에서 진행된 슈베르트 특집 실황녹음에 시종 참여했고 그 내용은 DVD 음반으로 제작되어 국내에도 소개된바 있다. 그 화면에 등장하는 브렌델은 여전히 젊고 정력적인 모습이었다.슈베르트 특집을 주도할만큼 그는 누구보다 슈베르트 음악에 지지와 옹호를 보낸다. 이 특집을 보면 그는 슈베르트 생애와 모든 작품에 학자 못지 않은 열정을 바치고 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연주로 크게 인기를 얻었던 브렌델이지만 그의 슈베르트 연주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낡았을 거란 추측은 기우였다. 이미 고희를 훌쩍 넘긴 노인이 되어 있으나 건반 앞에서 그는 여전히 젊고 정력적인 연주가였다. 그의 <즉흥곡>은 감각적이거나 파격과는 거리가 있지만 절제로 빚어내는 정확한 톤의 울림은 깊고 길게 이어진다. 이미 거장이 된 브렌델, 그의 고지식할 정도로 꾸밈없는 소박한 연주는 어떤 파격보다 설득력과 공감을 준다. 이것이 슈베르트 참모습일 것이다. 음반으로 듣던 때 이 사람은 건반 앞에서도 한 점 표정 변화 없이 냉정한 자세로 일관할 거라고 상상했는데 <피아노 소품,D946>의 2번에서 그는 흐느끼듯 몸을 뒤틀며 전율하는 모습을 보였다.냉정한 연주 이면에 그도 누구 못지 않게 뜨거운 열정의 인물인 걸 알았다.

 

공교롭게 브렌델과 이블린 크로세가 손을 맟춘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피아노 판타지(Op.103,D940)가 눈에 띤다. 둘의 성향으로 미뤄 상상하기 힘든 듀엣이다. 이블린 크로세는 몸을 감추고 노출을 꺼리는 인상을 준 것이다. 그에 관한 자료도 바흐 곡과 가브리엘 포레의 곡을 제외하곤 만나기 쉽지 않다. 이것은 예상밖의 선물이다. 드물게 짜임새가 좋고 균형잡힌, 아름답지만 슬픔이 배어있는 곡, 어느쪽이 리드를 하는지 구분하기 힘들만큼 네 손의 발란스가 잘 어울어진, 명인들의 품격을 보여주는 좋은 연주다. 이 <F 단조 판타지>는 자주 연주되는 인기곡이다.

 

 

알프레드 브렌델 - Shubert- Four Impromptus, D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