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에밀 길렐스의 베토벤 소나타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태어난 소련 최고의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
강인한 힘과 섬세한 시정을 동시에 갖췄다.
최근 베토벤을 다시 듣기 시작했다. 좋게 말하면 집중해 듣는 버릇이 있어서 한 작곡가에게 끌리면 한동안 거기서 벗어날 줄 모른다. 그동안 바흐, 쇼팽에 몰두하느라 거의 몇 해 동안 베토벤을 듣지 않았다. 톨스토이 말마따나 “앞으로 직진할 줄밖에 모르는” 베토벤 음악은 젊을 때나 듣는 음악이라고 치부해 버린 감이 있다. 그러던 중 최근 유튜브를 산책하다 우연히 에밀 길렐스(Emil Gilels·1916~85)가 연주하는 몇 가지 소품을 듣고 그 강력한 흡인력에 끌려들고 말았다.
4분짜리 라흐마니노프 전주곡과 그보다는 조금 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5번의 끝악장 알레그로를 들었는데 ‘강철의 피아니스트’라는 별칭에 걸맞은 강력한 터치와 경묘한 운신에 금방 매료됐다. 이게 계기가 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오직 길렐스의 연주로 하나하나 듣기 시작한 것이다. 녹턴이 쇼팽에게 생의 내면적 기록이듯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역시 그가 생애 전반에 걸쳐 이루어낸 생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음악 수용 과정에서 연주가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말해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 작품의 호불호가 연주가로 인해 결정되는 경우도 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나 전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구입했다가 우리말 번역이 맘에 안 들어 읽기를 그만둔 일이 있었다. 그 뒤 다른 번역을 구해 겨우 읽을 수 있었다.
십수 년 전 이야기인데 어느 모임에서 초면의 인사가 “베토벤은 누구 연주를 듣지요?” 하고 내게 불쑥 물었다. 그를 아는 사람 소개에 의하면 그 인사도 평소 음악감상에 꽤 열정을 지녔다는 것이다.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을 끌면 예의가 아니다. “에밀 길렐스.” 내 입에서 나 자신도 예상 못한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때 나는 길렐스 연주를 별로 듣지도 못했고 그에 관해 아는 바도 없었다. 그런데 서구 일부 평가 사이에 ‘길렐스는 피아노를 망치로 두드리듯 힘만 가지고 거칠게 친다’는 비난이 떠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떠올라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뭔가 질투와 시기심 때문에 거꾸로 그런 악담이 나온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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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로 들었던 연주가는 빌헬름 켐프, 알프레트 브렌델 등이었다. 한동안 브렌델 베토벤 음반이 장안을 휩쓸었다. 그의 연주가 명징하고 온건해 현대인 취향에도 맞았다. 그러니까 둘 중 한 사람 이름을 말했어야 하는데 엉뚱한 답변을 한 것이다. 그런 뒤 내가 과연 합당한 답을 한 것인지 걱정이 돼 길렐스 음반을 구해 열심히 들었는데 다행히도 ‘베토벤에 관한 한 답은 에밀 길렐스’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름 그대로 ‘망치 소나타(Hammerklavier Sonata)’도 들어봤는데 초반의 강렬한 타건에 귀가 약간 충격을 받긴 했지만 길렐스의 강렬한 직진성이 베토벤 음악과 참으로 궁합이 잘 맞는 걸 확인했을 뿐이다.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는 말이 회자된 바도 있지만 길렐스의 연주 모습을 보노라면 이 사람은 정말 목숨을 걸고 피아노를 친다고 말해도 무리가 아닐 만큼 건반 앞에서 온몸으로 사투하듯 열정적으로 연주한다.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제스처나 표정연기 따위는 개입할 틈이 없다. 가끔 고개를 들어올릴 때 마주 보이는 그 순수한 눈빛에 그가 지금 전력을 쏟아 드러내고자 하는 음악의 정령이 문득 엿보여 나는 전율한다. 머리 스타일만 조금 다를 뿐 그 눈빛과 꽉 다문 입술 등 인상도 베토벤과 흡사하다.
그가 베토벤 소나타 전곡 녹음을 앞두고 겨우 다섯 곡(no.1, 9, 22, 24, 32)을 남겨놓고, 아직 만년의 원숙기가 기대되던 나이에 갑자기 타계한 사실이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베토벤 연주는 명가들이 즐비해 사실 누구 한 사람 치켜세우는 게 무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렐스 연주는 뚜렷한 발음, 사소한 여린 음에도 생명력을 불어넣어 숨쉬게 만든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연주와 차별된다. 그는 러시아 작품을 비롯해 쇼팽, 바흐, 브람스 등 다양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으나 베토벤 곡을 연주할 때 뿜어내는 빛과 기백을 여타 곡에서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의 손가락은 베토벤 음악에 육화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베토벤 소나타는 ‘월광’ ‘비창’ 등 명품이 많아 언제나 이 명품 위주로 연주가 되는데 귀에 익지 않은 초기의 5번, 7번 등에서 도리어 사색과 도약이 대비되는 베토벤의 특성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존재의 가벼움’이 아닌 ‘존재의 비천함’이 유난히 빈번하게 우리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던 한 해였던 것 같다. 많은 이웃이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 하는데 나는 그 설을 믿는 편이다. 음악은 내게 비상구였다. 정신을 한없이 고양(高揚)시켜 주는 것은 음악의 가장 큰 덕목이며 기능이다. 베토벤 음악만큼 우리를 드높은 꿈으로 이끄는 음악도 달리 없다. 연주할 때 에밀 길렐스의 눈을 보라. 그는 자주 고개를 들고 그 높은 지점을 응시하곤 한다.
GILELS plays Beethoven - Hammerklavier Sonata Op 106 (1/7)
https://www.youtube.com/watch?v=X5Ov1mMOQrk
업데이트 - 이정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