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피아니스트 벤 킴
1983년 미국에서 태어난 벤 킴은 2006년 독일 최고 권위의 뮌헨 ARD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했다.
[www.benkimonline.com]
아이가 잠을 자고 있는데 젊은 아빠가 귀가해 적당히 취한 기분에 귀여운 아이를 위해 갑자기 자장가를 불러댄다. 잠에서 깨어난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다. 그걸 보고 아빠가 기뻐 소리친다. “오, 내 아이의 음악적 감수성이 놀랍구나!” 자신이 못 이룬 음악의 꿈을 2세가 대신 이루는 게 그의 오랜 꿈이었던 것이다. 이 환각 상태는 오랫동안 지속된다.
2005년 모스크바에서 서울 가는 비행기가 뜨지 않아 갑자기 며칠 민박집 신세를 지게 되었다. 첫 밤을 보내고 주방에서 조반을 먹고 있는데 옆방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요?” 내 물음에 주방 여성이 대답했다. “부산서 온 여학생요. 중학교 3학년이라는데요. 방학 중에 특별히 레슨 받으러 부모님이랑 함께 와 있지요.” 내가 듣기에 아무래도 전공하겠다는 중학생의 연주는 아니었다.
“아이구, 많이 늦은 것 같네. 나라면 레슨 당장 그만두고 여기 왔으니 가족끼리 러시아 지방여행이나 실컷 하고 돌아갈 거야.” “공부를 잘하니 바이올린 그만두고 공부에 전념시키자는 게 엄마 생각인데 아빠가 고집불통이래요.” 주방 여성이 덧붙인 말이다. 그녀가 내 말을 부모에게 고스란히 전한 모양이었다.
저녁에 학생 어머니가 청해 부부와 주방에서 잠시 만났다. 나이 지긋한 남편은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아내 설득으로 억지로 자리에 나온 게 분명했다. 나는 아침에 주방에서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가타부타 말없이 돌아갔다. 이튿날 주방에 갔는데 주방 여성이 말했다. “레슨 그만두고 새벽같이 모두 지방으로 여행 떠났어요.”
나는 선행을 베푼 것인가? 혹은 한 중년 남성의 꿈을 주제넘게 가로막아 버린 것인가? 모스크바 중앙음악학교라면 전통 있는 음악영재교육기관으로 임동혁 형제도 그곳을 거쳤다. 초등부터 고등까지 모든 과정이 있는데 그곳 교내 발표회를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초등반 저학년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를 들어봤는데 적기에 기초를 잘 닦아줘서 그런지 악기를 다루는 기술 면에서 성인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아이들과 경쟁한다는 건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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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킴(미국명 Benjamin Kim)은 한국계 신인으로 피아노 세계에서 근래 내가 발견한 출중한 재능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 그가 눈에 띄지 않는다. 더 큰 무대를 준비하느라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있을까? 2006년 음반 리뷰 때문에 그의 음반을 처음 들어봤다. 분명 처음 듣는 이름인데 사진을 보니 강남 번화가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요즘 말로 한국형 ‘꽃미남’이다. 너무 얼굴이 곱상해서 ‘이런 얼굴로 연주가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였다. 키신 같은 러시아 꽃미남도 있긴 하나 중견이 된 키신의 얼굴에는 세상의 고통을 알아버린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어 어릴 때 키신과는 인상이 사뭇 다르다.
연주가의 인상이란 참 중요하다고 늘 생각해왔다. 경험상 연주가 첫인상을 배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벤 킴의 연주가 나의 편견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재미동포 출신인 그는 서울에서 이미 두 차례 연주회를 열었고 팬을 다수 거느리는 스타가 되어 있다는데 이 사실도 음반을 접하고 처음 알았다. 미국 출신 한국 교포, 국적은 미국일 거고 혈통은 한국인인데 우리는 그냥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데뷔 음반에는 ‘장송행진곡’이 포함된 쇼팽의 피아노소나타 2번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4번, 2번, 그리고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이 수록돼 있다. 성격이 조금씩 다른 곡들이 알맞게 배치된 셈이다.
큰 기대감 없이 쇼팽을 들었는데 벌써 그의 연주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소리의 절제와 확장을 조율하는 감각이 뛰어나 피아노를 참 잘 다룬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쇼팽 세계에 깊이 젖지 않아 감흥이 엷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대로 젊은 화가의 화폭처럼 신선감은 느낄 수 있었다. 모차르트는 아주 좋았다. 특히 소나타 4번의 2악장과 3악장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신선감으로 충만했다. 멈칫대거나 주저하지 않고 아름답고 얼마간 경건하기도 한 모차르트 세계를 명쾌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놀라웠다. 다소 과장이 허용된다면 근래 들은 모차르트 가운데 가장 감칠맛 나는 모차르트였다. 벤 킴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 모차르트 연주 때문이라고 해도 맞다. 음악을 듣고 그의 사진 얼굴을 다시 바라봤다.
드뷔시 곡들은 벤 킴이 특히 좋아하고 장기로 삼는 곡인 듯하다.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에서는 3악장 ‘달빛’의 시정 넘치는 묘사가 돋보였다. 그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지만 스승 레온 플라이셔의 한마디만 소개한다. “그는 최정상 연주가로 커리어를 쌓아갈 커다란 잠재력을 가졌다.”
음반을 들을 때 벤 킴은 아주 편하게 연주하는 걸로 느껴졌는데 막상 연주영상을 보니 진땀을 흘리며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걸 발견하고 적지 않게 놀랐다. 특별한 재능을 타고 나도 연주가의 길은 험하고 멀기만 하다. 그래서 가끔 나는 ‘듣는 자가 왕이다’라고 말한다. 모스크바 민박집에서 만난 그 부모에게도 나는 이 말을 강조했었다.
Chopin - sonata no.2 in B flat minor op.35
https://www.youtube.com/watch?v=WpMQq8ik8SA
업데이트 - 이정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