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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멘델스존 ‘무언가(無言歌)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Victoria Postnikova·1944~)는 해외에 덜 알려진 러시아 피아니스트다.
세계적 지휘자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가 그의 남편이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곧 코스모스가 여기저기 들길에 피어날 것이다. 남녘 어느 길 모퉁이에는 이미 코스모스가 그 수줍은 자태를 드러내고 있을지 모른다. 코스모스는 값이 없고 여기저기 지천으로 널렸으나 그 맵시 있는 자태는 다른 값 비싼 꽃들에 뒤지지 않는다.

음악에서 이런 곡을 찾는다면 멘델스존의 ‘무언가’가 제격이 아닐까? 멘델스존에겐 그의 명성을 높여주는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를 비롯, 교향곡과 피아노3중주 등 많은 작품이 있다. 그렇지만 내가 그 이름에 유별난 친밀감을 느끼고 늘 기억하는 것은 그런 인기곡들보다 그의 평생작업의 결실인 ‘무언가’다.

이 음악은 처음 무심코 들을 때부터 솜에 물이 흡수되듯 내 청각에 저절로 흡수되었다.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저절로 그 음악이 가슴속에 자리를 잡았다. 귀에 스치기만 해도 가슴이 저려오는 짧고 간소한 소품들. ‘즐거웠던 회상’ ‘봄 노래’ ‘사냥꾼의 노래’ ‘은밀한 이야기’ 등. 이런 노래들은 오랜 기간 내가 가장 가깝게, 친밀감을 느끼며 들어온 곡이다.

뜨겁고 격렬한 삶의 현장에서 잠시 한 발 뒤로 물러나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지나온 기억을 조용히 음미하고 되새겨 보는 시간을 이 음악은 제공한다. “해질녘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에 손을 놓고 있으면 뭔가 가락이 떠오를 것이다. 멘델스존처럼 재능 있는 사람이면 ‘무언가’를 탄생시킬 것이다.” 슈만이 한 이야기다. ‘무언가’는 삶의 여러 편린을 수채화 혹은 파스텔화로 그려나간 하나의 파노라마다. 그러나 어떤 구상화나 유화보다 우리 가슴에 깊이 젖어 든다. 슬픔은 위로하고, 즐거웠던 기억은 아주 생생하게 되새김질해준다.

 

나는 전쟁 이전 잠시 누렸던, 아주 짧았던 행복했던 유년기를 늘 이 음악과 함께 회상하곤 한다. 맨 처음 기제킹(Walter Gieseking,1895년 ~ 1956년.작은 사진)의 음반을 통해 단아한 연주를 들었다. 그 음반은 아주 낡은 것인데 음악실에 나가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어느 해 겨울 밤에는 ‘무언가’를 실컷 들으려고 야간 당직을 자청해 음악실에서 꼬박 밤을 새운 적도 있다. 다음에는 바렌보임의 최신 전곡집을 들을 수 있었다. 잡지에서 나의 사연을 읽은 하와이의 동포 여성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준 음반이었다. 근래에는 형편이 좋아져 CD를 포함해 10여 종의 음반을 갖게 되었다.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 음반들 가운데 88세에도 여전히 무대에서 ‘무언가’를 연주하는 헝가리 태생의 리비아 레프(Livia Rev, 1915~)가 있고, 전설의 연주로 평판을 굳혀가는 프랑스의 지네트 두아앵(Ginette Doyen, 1921~2002)이 있고, 근래 괄목할 만한 발견으로 자처하는 러시아 여성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가 있다. 리비아 레프의 연주 모습을 보면 평생 오직 이 곡만을 연주하기 위해 살아온 연주자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튀지 않으며 평범한 듯 하지만 곡의 정취에 깊이 젖어 있는 연주를 들려준다.

지네트 두아앵은 일견 꾸밈없는 간명한 연주지만 적절한 리듬 속에 안개가 서린 듯한 짙은 서정성을 전해준다.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 음반 가게에서 처음 연주를 들었을 때 귀가 번쩍 뜨였다. 뭔가 번쩍거리는 게 감지되었다고 할까. 구태여 말하면 보다 젊고 힘이 있고 솔직한 지네트 두아앵을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환상적이라거나 시적이란 말은 의미가 없다. 포스트니코바는 연주하는 가운데 스스로 창조할 줄 아는 연주가라는 표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사냥꾼의 노래’, 축제를 장식하는 곡으로 여겨지는 이 노래를 그의 연주로 듣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경험인가? 그는 이 ‘무언가’에 잘 조율된 손가락과 자기 감성으로 자신의 노래를 연주하고 있다.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가 반려자인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와 함께 10월에 서울에 와 서울시향과 차이콥스키의 ‘콘서트 판타지’를 연주한다는 기사를 시향 정보지 SPO에서 보았다. 몇 해 전 그녀의 팬이 되어버린 나는 포스트니코바의 서울 무대를 반기지 않을 수 없다(로제스트벤스키의 건강 문제로 두 사람의 내한 공연은 취소되었다. 10월 24일 시향 연주회는 유카페카 사라스테가 지휘한다).

‘무언가’는 연주자마다 앞다투어 음반을 내고 있지만 무대에서 이 음악을 들어볼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간단한 소품이지만 막상 제 맛을 살리는 연주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이유일지 모른다. 단순히 다른 연주의 답습에 그친 밋밋한 연주 음반들도 더러 보았다.

‘무언가’에는 곡마다 소제목들이 빠짐없이 달려 있다. 이것들을 보노라면 마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줄거리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헤세가 자신보다 두 세대나 앞선 멘델스존의 음악을 집중해서 들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두 세계가 너무나 닮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명상’ ‘뜬 구름’ ‘비상’ ‘잃어버린 환영’ ‘꿈’ ‘이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등. 이런 테마와 이미지는 소설 『데미안』에 수없이 등장하며 작품의 테마도 되고 윤활유도 된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인가? 혹은 헤세니까 멘델스존 음악을 당연히 깊은 관심으로 감상한 것일까?

 

Livia Rev(리비아 레프) (93!) Mendelssohn Songs without Words Master class in Szeged 06-06-2009 .

https://www.youtube.com/watch?v=BMC7haTzn7g

 

지네트 두아앵(Ginette Doyen) plays Mendelssohn Song Without Words Op. 62 No. 6 .

https://www.youtube.com/watch?v=4K84X4GUMbg

 

업데이트 - 이정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