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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이 모음곡 안에 존재하지 않는 감정은 없다.” -파블로 카살스. “어느 날 당신은 이 음악의 모든 걸 알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다음 날 당신은 또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된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답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습니다. 세상의 신비로운 모든 것을 하나의 첼로 속에 담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피터 비스펠베이.

이쯤에서 이 음악의 정체는 밝혀졌을 것이다. 앞의 언급들은 표현만 조금씩 다를 뿐 드러내는 의미는 같은 것이다. 1992년 필자가 러시아에 처음 갔을 때 크렘린 광장을 안내하던 러시아 청년 가이드는 바로 전 해 8월 보수파 공산당의 쿠데타가 진압된 직후 이 광장에서 로스트로포비치의 바흐 첼로곡 연주가 있었다고 알려줬다. 그때 삽시간에 수많은 청중이 모여들어 열띤 호응을 보였다는 얘기를 듣고 부럽기도 했고 신선한 감동을 받기도 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이보다 두 해 앞서는 89년 말, 독일 통일 당시 무너지는 베를린 장벽 앞에서도 같은 곡을 연주(큰 사진)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첼로 음악에 솔로 곡이 많지 않아 선택의 폭이 좁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는 왜 극적인 순간에 같은 곡을 반복 연주했을까? 이 모음곡을 즐겨 듣는 사람도 가끔, 혹은 자주 이 음악의 모호성과 그 진정한 정체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본질적으로 형태상 춤곡이다. 추억이나 회상에 젖는 시간에 우리는 오랜 삶을 거치면서 추었던 갖가지 몸짓을 무의식 중에 상기할 것이다. 삶은 여러 개의 동작으로 어우러진 춤과 다를 바가 없다. 비록 미적으로 그것이 요약되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고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춤이긴 해도. 무대에서는 미적으로 섬세하게 다듬어진 여러 형태의 춤을 감상할 수가 있다. 사라방드의 느슨하지만 신성한 느낌을 주는 선율과 울림, 쿠랑트의 민첩하고 역동적인 가락, 호흡을 닮은 가보트의 반복되는 악절들이 주는 쾌감,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거쳐온 삶의 구차스러운 동작들과 연결되고 그것을 묘사한다고 봐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적절한 균형감과 세밀한 디테일을 갖추고 삶의 역사를 묘사할 뿐 아니라 거기에 때로는 위안과 품격과 사랑을 부여하고 있다. 굴욕당하고 불행에 찌든 삶에도 예외 없이 품격과 사랑, 위안을 제공해 준다.

오래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인도의 ‘까딱 춤’을 배우는 한국인 연수자의 춤을 보았다. 춤사위가 매우 까다롭고 고난도의 요가 수행을 보는 것 같았다. 오랜 수련과 훈련이 필요한 춤이었다. 이 춤의 스승인 인도인 무용수가 ‘까딱 춤은 삶의 묘사’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쉽게 이해되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20세기 첼로의 사제로서 카살스의 뒤를 잇는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연주는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가끔 이 곡 애호가들 사이에 “카살스냐? 푸르니에냐?” 같은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사실 이것은 논쟁거리도 아니다. “보르도산 포도주냐? 우크라이나산 포도주냐?”와 같은 개인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누구의 연주를 들을까? 조금 차별화된 연주는 없을까? 벨기에 출신 첼리스트 로엘 디엘티앙(Roel Dieltiens, 1957~·작은 사진)의 이름이 선뜻 떠오른다. 그는 독특한 연주화법으로 단숨에 필자의 관심을 끌어당긴 연주자다. 대가나 중견이나 모든 연주자들이 웅변이나 열변을 토한다면 디엘티앙은 감상자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작고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여준다. 이런 연주는 처음 대하는 것이고 그만의 스타일이다. 이 인상 좋은 연주가에 관해선 알려진 게 많지 않다. 벨기에 앤트워프 음악원에서 수업을 시작했고 데트몰트 고등음악원에서 앙드레 나바라 등을 사사했으며 벨기에를 비롯, 유럽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게 고작이다. 푸르니에에게서도 잠시 배웠다는 이력이 있다. 그런 인연인지 음반 카탈로그에 푸르니에의 극찬이 소개되고 있다. “그의 재능은 대단한 성공을 보장할 것이다. 그와 같은 개성 있는 연주가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디엘티앙의 연주는 동적인 면과 정적인 면이 극명하게 대비되는데 자세를 낮춰 느리게 속삭이는 부분은 조용한 휴식처럼 느껴지며 빠른 템포에서 짧게 짧게 끊어 치는 독특한 주법으로 아기자기한 무곡의 리듬을 살려낼 때는 매우 경쾌하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디엘티앙처럼 이 곡을 작은 규모로 축소시켜 아기자기한 맛을 살리며 연주하는 사람은 없다. 3번 전주곡과 6번 쿠랑트에서 그런 시원한 맛을 십분 느낄 수 있다. 그는 6번에서 5현 악기인 첼로 피콜로를 사용하는데 그가 고악기 사용에 능한 것도 그의 이런 연주 성향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다감하고 섬세하다는 점에서 그는 발군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가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 것은 그가 이 음악의 복합적 정서와 감정을 놓치지 않고 매우 현명하게 그것들을 실어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처럼 차별화된 연주를 할 수 있을까? 푸르니에가 지적하듯 디엘티앙의 대단한 재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평소 쉽게 접근하기에는 이 곡이 왠지 무겁게 느껴진다고 생각한다면 디엘티앙의 다정한 속삭임에 한번 귀 기울여 볼 만하다.

 

J.S. Bach - Suites for cello solo - 로엘 디엘티앙(Roel Dieltiens) (1991)

https://www.youtube.com/watch?v=imWZY9qpw3Q

*53분 27초에서 Suite VI-3.Courante(쿠랑트)를 들을 수 있음.

 

업데이트 - 이정숙